남지형 작가평론
관계맺기, 다시-봄
안현정(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단지 동물은 우리 모두의 다른 얼굴일 뿐,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행복한 세상이다.” - 남지형 인터뷰 중에서
한곳에서 만날 수 없는 동물들이 ‘가족 같은 관계’가 되어 모이는 상상, 남지형 작가는 인권과 동물권(Animal rights)을 하나의 생명권 안에서 서술하면서, 동물 역시 고통과 학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상부구조에서 내려다본 하부구조의 권력구조가 아닌 ‘평등한 존재’로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 이는 동물을 ‘길들이기’에서 벗어나 ‘관계맺기’의 시선으로 확대한 작가만의 ‘어루만지기’ 프로젝트다. 어찌 보면 작가의 동물들은 모두 다른 종(種)으로 표출되지만, 이는 자신만의 성격과 개성을 가진 ‘인간화된 존재’처럼 그려진다. 그림 안에서 그들은 주체로서 당당히 존재하며, 통제의 수단이 아닌 자유의 존재로서 활동한다. 작가는 이러한 동물의 권리에 대해 “동물이 하나의 돈의 가치로, 음식으로, 옷의 재료로, 실험 도구로, 오락을 위한 수단으로써 쓰여서는 안 되며, 동시에 인간처럼 지구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강조되는 ‘감성색(感性色)’의 에너지들은 공감(共感)에서 공생(共生)으로 나아가는 상호존중을 향한 키워드이다. 실제 작가는 버려진 동물을 키우면서 ‘학대’가 낳은 인간의 폐해가 얼마나 그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지를 경험한 바 있다. 학대당한 동물은 약자로서의 우리와도 유사하다.
남지형의 작품들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해체하고, 존재론적 평등을 주장하는 관점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작가의 회화는 단지 동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인간/비인간”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질문을 던진다. 작가가 말하는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세상”은 존재의 본질적 평등을 요구하는 윤리적 상상이며, 이는 철학적 사유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어온 물음이기 때문이다. ‘동물 평등권’을 향한 작가의 발언은 ‘약자생존(弱者生存)’을 경험한 ‘한국 근대의 트라우마’로까지 확대된다. 동물원-박물관-백과사전처럼 인류는 근대세계의 발견 속에서 모든 지식을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 의해 재편해왔다. 약자생존에 대한 인간의 이기심은 결국 모든 동물권에 가치조차 “길들이기”로 규율화 시켰고, 이는 동물이 누려야 할 자연적 권리마저도 이탈시키는 현상을 초래했다. 작가는 < 너는, 꽃 >이라는 신작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물을 향한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어린 시절 수족관을 했던 집안의 내력은 ‘수족관에 담긴 물고기들의 생존권’을 향한 자전적 질문과도 연결된다.
어루만지기, 하이퍼에서 감성색(感性色)으로
남지형 작가는 동물학대라는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극사실적 감성주의’라는 회화적 장르로 풀어내며, 단순한 고발을 넘어 ‘반성과 치유’라는 정서적 층위를 작품에 녹여낸다. 작업은 감정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관람자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데, 이는 사실적인 묘사력 속에 감정과 기억, 윤리적 성찰이 탁월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동물 그림은 말 그대로 현실보다 더 현실 같다. 털 한 올, 눈동자의 빛, 상처의 결까지 치밀하게 재현된 그림은 처음에는 미적 감탄을 이끌지만, 곧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작가의 동물들은 단순한 생물적 객체가 아니라, 인간의 무관심과 폭력, 착취로부터 그림 안에서 재탄생한 존재들이며 동시에 생명과 존엄의 상징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는 그 자체로 감상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장르지만, 남지형은 이 장르를 ‘도구’로 사용하여 현실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맞선다. 그리고 이는 회피가 아닌 직면(直面)을 유도한다. 마치 “이것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듯, 관람자는 고통받는 동물의 눈을, 피부를, 상처를 어루만지며 ‘관계맺기, 다시-봄’이라는 명제를 확인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작가의 서사 속에는 강한 윤리적 질문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는 왜 동물을 이렇게 다루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예술은 그 고통을 어떻게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는가”로 확장된다. 작가는 이 질문에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관람자들을 ‘느끼고, 멈추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치유의 이미지는 재현을 넘어선 공감을 유도하며, 아픔을 말하는 동시에 본인 자신에 대한 극복을 담는다. 이 지점에서 남지형의 그림은 예술의 본질적 기능, 즉 ‘공감’과 ‘회복’의 장을 열게 된다. 동물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지는 오늘날, 작가는 시대의 질문에 응답하며, 회화가 단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닌,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남지형의 그림은 응시다. 어두웠던 초기 작업을 가로질러 ‘밝고 화사한 색감들이 모인 동물들의 유토피아 세계’를 응시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 응시를 통해 우리 사회가 치유하지 못한 상처를 어루만질 뿐 아니라, 나아가 ‘상호존중을 향한 지속가능한 관계’를 보여준다. 자크 데리다는 《동물을 따라 생각한다(L’Animal que donc je suis)》라는 강연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전복하며 “나는 동물이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온 서구철학의 전통을 비판한 것이다. 동물의 눈을 박제된 이미지로 바꿔버리는 인간의 태도는, 남지형 작가가 회화로 극복하고자 하는 구조와 정확히 맞물린다. 남지형의 동물 그림은 데리다가 말한 ‘동물의 응시’를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눈빛을 통해 관람자는 더이상 무관심한 인간이 아닌, 책임의 자리에 선 존재로 거듭난다. 조르조 아감벤 역시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개념을 통해 국가 권력이 어떻게 생명을 분류하고 배제하는지를 비판한다. 실험실의 대상, 음식, 의류 소재, 오락물로 사용되는 동물은 생명이지만, 존엄을 인정받지 못한다. 남지형의 그림은 이처럼 인간 사회의 윤리 바깥에 위치한 생명들을 정면으로 다룬다. 작가는 배제된 존재를 어루만지는 행위 속에서 동물에게 ‘감성 있는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존재의 경계를 묻는 회화, 동물과의 교유(交遊)
작가는 자주 동물 관련 다큐를 보며 그들의 생활을 배운다. 우리(Cage) 안에 갇힌 동물을 보는 것이 싫어서 동물원에 처음 간 것도 2023년 이후였다. 작가는 이기심의 반대편에서 동물을 생각한다. 그래선지 동물원의 상처 입은 동물들은 그림 안에서 치유되어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그림 속 대상도 원숭이-사자-호랑이-타조 등으로 점점 확대되었다. 작가는 실제 밖(인간의 삶)에서 얻은 상처를 그림 안에서 회복하면서, 붓질을 통한 ‘어루만지기’를 시도한다. 작가는 고백을 살펴보자. “내 붓질은 동물을 어루만지는 행위다. 그리다 보면 지나간 상처들을 잊고 어느새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빠지게 된다. 최근 작품들이 극사실성(Hyper-realism)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이유는 그림 안에서라면 모든 아픔이 해소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는 과정에서 치유 받았듯이, 내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이 아픈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실제로 작가의 최근작들은 붓질이 단순해진 대신 색(色)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낸다. 이는 색이 작가의 감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작품 제목도 , , < 가족사진 > 처럼 ‘혼자가 아닌 함께’를 지향한다. 작가는 약육강식의 지배구조에서 벗어나 ‘북극곰, 펭귄, 뱅갈 호랑이’ 등 실제 만나기 어려운 동물들을 한 화면에 배치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창출한다. ‘공생을 통한 따뜻한 관계맺기’를 통해 행복한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바람 때문이다. 남지형 작가는 “단지 동물은 우리 모두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발언은 단순한 감상적 연민을 넘어서, 동물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경계를 허무는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행복한 세상”을 향한 바람은, 근대 박물학이 구축했던 ‘인간 중심의 분류 체계’에 대한 명백한 반론(反論)을 제기한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우리가 오랜 시간 자연과 동물을 어떻게 ‘구분 짓고 객체화’해왔는지를 묻고, 그것을 예술적 방식으로 뒤집는 ‘명쾌한 해학성’을 갖는다.
18세기 이후 서구의 근대 박물학은 자연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전시하는 작업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이는 인간의 지식 욕망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자연과 타자를 ‘보이는 것’, ‘소유 가능한 것’, ‘설명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켰다. 동물은 박제되어 진열되고 해부되며 학명(學名: 학술상의 편의로 분류된 이름)으로 치환된다. 이러한 제도적 시선은 동물을 생명체가 아닌 ‘지식의 대상’이자 ‘문명의 타자’로 규정짓는다. 분류 체계를 넘어선 존재론적 평등, 이것이 남지형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동물을 ‘나의 다른 얼굴’이라 칭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윤리적 상상력’으로 지움으로써 박물학적 시선—즉, 생명을 도구화하고 분류함으로써 타자를 소유하려는 관점—을 경계하는 것이다. 남지형은 동물을 ‘다시-존재’로 회복시킨다. 그래서 동물들을 박제된 대상이 아니라, 감정을 지니고 눈빛을 가진 ‘주체’로 살아 숨 쉬도록 유도한다. 이때 관람자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라, 공감자(共感者) 혹은 교유자(交遊者)로 호명된다. 작가는 동물을 ‘타자화’하는 대신, 그들과의 연결 가능성, 공존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자신의 회화를 관계와 감정, 공감의 가능성으로 확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