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명확히 하게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일상의 세계에서,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로부터 한발 떨어져 관망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과한 주관은 불필요해지고 필요한 것들만 남아 고요한 머릿속 나열된다. 이러한 이유로 그토록 산에 올랐던 것이다. 본인 조차 알아채지 못한 시간들이 스스로를 비워내고 채웠던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 누구에게나 이런 정화의 기회가 주어졌음 한다. 우리가 우리 답게 살아갈 날들이 그렇지 않은 날들보다 오래길 바라기에.
익숙함 속에 존재해온 작은 변화들이 쌓여 우연한 시선에 발각 되었을 때. 그 것은 더 이상 영원할 거란 안도감을 상실한 채,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은 연약한 존재가 된다. 마치 인간처럼. 작가에게 ‘산’이 그러했다.
‘산은 세상의 풍파에 휩쓸리던 나를 안아 안식하게 하였고, 기쁨과 슬픔이 극도로 차올라 나를 잠식하려 들 때, 넘쳐흐른 것들을 바람과 함께 사라지게 했다. 쏟아지는 햇살은 언제나 태초의 순수했던 영혼을 기억하라 꾸짖었고, 가파른 언덕은 지나친 욕심을 삼가라 일러주었다. 나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늘 그 자리에 있어주는 그의 가르침이 좋았고, 이제는 그리움 속에 남은 어떤 이와 닳은 그의 태도가 좋았다.’
변화를 감지하기 전까지는 그러기만 했다. 한결 같아 무한히 안식처가 되어줄 것 같았던 ‘산’ 또한 낡고 닳아 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서둘러 그 곳을 기록해 기억하고자 하였다. 언젠가는 그리움 속에 남을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에 겁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 산이 알려준 것과 놓아주고 싶지 않은 모습들을 작가의 방식으로 그리기로 마음먹은 후에야 조금은 평온할 수 있었다.
찰나의 영화로움이 균열하고 붕괴되어 소멸해가는 것을 붙잡아 두려는 것은, ‘영원’을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떤 이의 숨이 멈춘 것과, 지난한 시절과 찬란한 시절의 끝과 혹은 반복됨을 경험하면서 깨달았다. 과거 영원은 있을 수 없기에 바라는 것 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 바람으로 현재를 곱씹어 보기에 용이했고, 영원이 없기에 현재가 있어줌을 감사하며 집중할 수 있었다. 허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아직은 어린 영혼에게 이제는 영원을 바라는 순수한 바람 정도는 허락해주고자 한다. 모든 유한한 것을 향한 ‘영원히, 영원히’란 작가의 외침은, 작품 속에서 만큼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유한을 무한하도록 하는 주문과 같은 것이다.
먼 타국의 강줄기가 메말라 간다는 기사를 보게 된 어느 새벽, 오래전 그 강에 뿌려진 그리운 이의 대한 생각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저 그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 무음 >(2025)이다. 영원히 흐를 것만 같았던 강과 그 사람이 모두가 잠든 이 고요한 새벽을 틈타 멀리 흘러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그리는 내내 작가의 무의식 속 다음과 같은 시구를 반복해서 읊조리게 하였다.
강
그는 아마 죽어서도 강이고 싶었나 보다
죽어서도 흐르고 싶었나 보다
끝이기는 바라지 않았나 보다
강은 흘러 바다가 되고 말라서
공기가 되고 구름이 되어 비로 내려
어쩌면 그리운 이에게 가 닿을 수라도 있기에
그도 언제일지 모를 만남을 바랬던 것은 아닐까
죽음과 삶이 이어져 구름과 비로 닿을 수 있음은 자연의 순리를 목격하며 깨달은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의 죽음은 곤충의 해부로 이어진다는 것에서 자연의 순리 전과정이 ‘순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육체가 생을 다하여 그 양상이 변모한다 하여도 과학적 관점에서 그 육체는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며, 원자로 남아 영영 이 지구와 우주를 떠돈다. 그렇기에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러 또다른 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모든 과정들에 원인이 있었으며 결과가 따랐고 그 결과로 인한 영향들이 주변에 미친다. 한 사람이 명을 달리 하여도 그가 살아 숨쉬는 내내 영향을 끼쳐온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잊혀지는 것이다. 잊혀짐은 존재감을 느끼는 어느 순간에나 사라질 수 있다. 존재감은 존재를 느껴 기억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렇게 되면 느낄 수 있으니 없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닿을 수 없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과 사를 시작과 끝이라 하지 않겠다.
인위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 안에서 모든 것들은 순환하고 엉겁의 반복을 이뤄낼 것이기에. 한 곳에 안장되지 않고 자연에 의해 흐르겠노라는 이해할 수 없던 그리운 이의 유언은 남은 이들에 대한 사랑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듯 자연에서 찰나의 감각들이 축적되어 오랜 질문들의 해답이 되었다. 무의식에 가져왔던 인생의 질문들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답을 보여줬던 자연은 작가에게 그랬듯, 인간에 대입해 역사와 삶에 대한 해답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눈에 자연물은 언제나 의인화 되어 보였고, 고목의 모습은 그런 식으로 나이든 사람처럼 느껴왔다. 그중 굽고 갈라지면서도 켜켜이 삶의 궤적을 쌓아 올린 듯한 소나무의 모습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인생을 맡기지 않고 부단히 살아낸 티가 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도록 했다. 소나무 줄기의 단면을 확대하고 부각해 그린 (2025)는 작가가 나무 줄기에서 사람의 인상을 느끼고 있음을 나타낸다. 멀리서 보던 질서는 무너져 있고 갖가지 얼룩으로 채워진 모습이, 가까이 들여다 보았을 때서야 볼 수 있다는 사실 마저 사람의 인생과 닮아 있다. 나무 줄기는 작가에게 언제나 특별한 감상을 주는 애정의 대상이다. < 시간의 얼굴 >(2024), < 금이 간다는 것 >(2024)는 나무줄기를 마치 철판에 새긴 듯이 그려, 이 존재가 고착되어 영원한 생명력을 갖게 되길 바라고 있다.
영원한 것에 대한 갈증은 유한한 생명과 대비되는 무한에 가까운 어떠한 것을 탐구하는 데 이르렀다. 그리고 자연에서 발견한 규칙성과 유한함과 무한함의 반복, 만물 존재함의 이유와 같은 것들이 그 아름다움을 증폭시킴과 동시에, 자연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무한에 근접한 것일 수 있음을 깨닿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