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종이컵에 촛불을 켜며 그 따뜻한 열기로 손을 녹였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나는 그들과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얼굴은 몰랐지만,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그 순간만큼은 서로가 연결된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자주 시위에 나갔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종류의 리듬—공기, 감정, 에너지 같은 것을 느꼈다. 세상은 단순히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지는 감각의 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세상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함께 하는 에너지와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의 리듬이며 내 몸은 그 리듬 속에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 에너지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 경험으로 몸은 세계와 나를 잇는 통로이자, 모든 감각이 흘러드는 지점이다.
작품 속 누드는 얼굴을 그리지 않거나, 동물의 탈로 대체하거나, 검게 비워두며 특정 인물이나 성별이 아닌, 몸 그 자체에 집중한다. 이는 정체성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몸의 존재와 그 감각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감정이나 서사보다도, 몸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과 그 안에서 반응하는 리듬에 주목하고자 한다.
-정은결 작가노트 중에서-
fainting goat 전시 인터뷰
이번 전시의 제목은 FAINTING GOAT ‘기절염소’이며. 기절염소는 놀라거나 긴장할 때 근육이 경직되어 마치 기절한 것처럼 보이는 유전성 질환을 가진 염소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단순한 근육 반응이지만, 우리는 이 반응에 의미를 부여한다. 누군가는 그들을 웃음거리로 소비하고, 누군가는 약한 존재로 동정하거나, 또는 그 태도를 인간의 생존 방식에 빗대어 공감하기도 한다. 그렇게 기절염소는 하나의 동물종이 아닌 ‘상징’이 된다.
이처럼 존재는 단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의식과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의미를 통해 비로소 만들어진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의미를 부여하며 세계를 구성해 나간다. 이 세계는 절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나의 의식, 나의 감각 속에서 다르게 떠오른다.
내 작업은 이러한 의식의 작용과 몸의 감각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들이다. 얼굴이 없는 누드, 신체는 특정한 누군가를 재현하기보다는, 의미가 입혀지기 이전의 ‘몸’ 자체에 가깝다. 그 몸은 언제든 새로운 의미를 입을 수 있고, 언제든 다시 비워질 수도 있다. 나는 그 유동성과 열림 속에서 내가 감지한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기절염소는 이런 관점에서 상징적인 존재다. 어떤 자극 앞에서 몸이 굳는 이 비정상적인 동물은, 오히려 그 반응으로 인해 생존하거나, 때로는 대상화되며 소비되기도 한다. 인간 역시 비슷하다. 몸은 의식보다 먼저 반응하고, 우리는 그 반응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을 구성해 나간다.
존재하지 않던 것이 의식 속에서 의미를 얻고, 그렇게 '존재'가 만들어진다. 이 전시는 그 과정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도다.
-정은결 작가 전시 인터뷰 중에서-